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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레발은 필패'라는 말이 있다. 수많은 전례와 함께 스포츠 팬들에게 유명한 이 구절은 축구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K리그에서 이 구절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팀이 바로 울산이다. '비기기만 해도 우승', '대구탕의 저주' 등 셀 수 없이 많은 전과 때문에, 중요한 경기를 앞둔 울산 팬들은 가벼운 농담조차 조심스러워한다.

  울산 구단도 팬들과 같은 마음이었던 듯하다. 이번 경기를 앞두고 울산은 언행을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비 매치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상대를 도발하는 영상이나 메시지를 준비할 법도 했다. 그러나 울산의 구단 공식 SNS 계정에도, 구단 공식 유튜브 채널에도 특별한 콘텐츠가 게시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번 시즌 경기 전마다 업로드되던 '탑골울산' 시리즈도 이번 라운드는 올라오지 않았다.

 

광주전 직후부터 동해안 더비 당일까지 울산 현대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라온 9개의 게시물. 이 중 동해안 더비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게시물은 미디어 데이 기자회견 영상 단 하나뿐이다.

 

  포항은 지난 라운드의 반등을 상승세로 이어나가고자 하는 모습이었다. 김기동 감독은 유튜브 라이브로 진행된 미디어 데이에서 '(울산 상대하는 방법을) 선수 시절부터 꾸준히 알았다'며 자신감을 어필했다. 포항의 젊은 공격수 송민규는 유튜브 채널 '오늘의 축구'의 영상에서 동해안 더비 본인의 골을 기대하라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양 구단의 모습을 따라 팬들의 분위기 또한 달랐다. 울산 팬들은 지난 두 라운드의 무승부를 떠올리며 불안해했다. 자신감보다는 간절함이 엿보이는 분위기였다. 그에 비해 포항 팬들은 자신감을 내비치는 듯 보였다. 3라운드 서울전에서는 패했지만, 4라운드 인천전에서 1:4로 대승을 거두며 더비 매치 전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3승 1패라는 지난 시즌 상대 전적도 포항 팬들의 자신감을 드높였다. 인터넷상에서 펼쳐진 양 팀 팬들의 신경전에서도 포항은 분명 우세를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울산 김인성 선수 인터뷰 기사(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139&aid=0002133821)의 BEST댓글

 

  그러나, 이 자신감이 설필패로 귀결될 줄 누가 알았을까? 울산은 포항 스틸야드에서 펼쳐진 이번 동해안 더비에서 0:4로 완승했다. 지난 시즌의 복수를 조금이나마 이뤄냄과 동시에, 5경기째 리그 무패 행진을 이어가게 되었다.

 

 

 

울산의 압박 시퀀스와 고명진

 

 

  울산은 4-1-4-1 포메이션으로 경기에 나섰다. 김도훈 감독의 고심이 엿보이는 선발 라인업이었다. 3선에 두 명을 배치하던 4-2-3-1 포메이션 대신, 원두재를 수비형 미드필더에 두고 신진호와 고명진을 전진 배치했다.

  공격형 미드필더의 창의성을 최대한 살리던 4-2-3-1 포메이션에 비해, 4-1-4-1 포메이션의 중앙 미드필더들은 조금 더 많이 뛰며 공수 양면으로 기여해야 했다. 그래서 지난 4경기에 모두 선발 출전했던 윤빛가람을 과감하게 벤치로 내렸다.

  공격형 미드필더 이상헌이 빠지면서 공석이 된 U22 쿼터로는 이번 시즌 입단한 풀백 설영우를 선택했다. 울산에게 어느 경기보다도 중요한 동해안 더비로 프로에 데뷔하게 된 점도 의외였지만, 유스 시절에는 윙어, 울산대에서는 오른쪽 풀백으로 뛰었던 설영우가 왼쪽에 배치된 점 또한 놀라웠다.

 

  울산은 전반전에 승부를 건 듯했다. 경기 초반부터 포항을 공격적으로 몰아붙이며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번 시즌 처음으로 선발 출전한 고명진이 있었다. 후반전에 체력을 다 쓰고 교체될 때까지, 고명진은 공격 상황과 수비 상황 모두 넓게 움직이고, 많이 뛰었다.

  이번 시즌 울산의 공격 전술은 이청용의 중앙 진입을 최대한 활용한다. 이를 위해 오른쪽 중앙 미드필더 포지션의 선수는 지속적으로 상대의 중앙 자원을 끌고 다니며, 이청용이 활동할 중앙 공간을 만들어줘야 했다. 고명진은 전반전 내내 오른쪽 측면 깊숙한 지역까지 움직이며 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공격 상황보다 더 눈에 띄었던 점은 수비 상황이었다. 전반전 울산은 유기적인 전방 압박으로 포항의 공격 전개를 방해했는데, 그 전방 압박의 선두에 섰던 선수가 바로 고명진이었다.

 

  포항은 지난 라운드 인천전 처음으로 백쓰리 전술을 선보였다. 주전 풀백 심상민과 김용환이 나란히 상무에 입대하면서, 측면 수비 포지션에 생긴 공백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이 전술로 포항은 인천을 상대로 1:4 대승을 거뒀었다.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서였는지, 이번 경기에서도 포항은 백쓰리 전술을 선택했다. 그러나 울산이 준비해온 압박 전술은 포항의 백쓰리를 완벽하게 공략해냈다.

 

  전반전 울산의 압박 시퀀스는 측면이 시작점이었다. 포항이 후방부터 공격을 시작할 때면, 울산은 일단 4-5-1 형태로 물러나며 후방을 지켰다. 주니오, 신진호, 고명진, 원두재는 포항의 공격이 중앙으로 진행되지 못하도록 틀어막았다. 포항의 센터백들은 어쩔 수 없이 측면으로 공격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패스가 울산의 압박 전술 시작 신호였다.

  포항이 측면으로 공을 보내면 울산의 윙어, 중앙 미드필더, 풀백이 곧바로 그 주위를 둘러싸며 전진을 막았다. 윙백이 측면을 홀로 책임져야 했던 포항은 울산의 측면 압박을 쉽게 뚫어낼 수 없었다. 결국 공은 다시 후방으로 돌아가는데, 이 타이밍에 맞춰 울산은 전방 압박을 시도했다. 주니오와 반대편 측면의 2선 자원이 순간적으로 전진하며 포항의 센터백들을 위협했다.

 

팔로세비치가 백 패스를 할 것 같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센터백을 향해 뛰기 시작하는 김인성

 

  이 2선의 전방 압박 역할을, 오른쪽에서는 고명진이 홀로 도맡았다. 이청용의 체력을 최대한 공격 장면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수비 장면에서의 체력 부담을 고명진이 대신 짊어진 셈이었다. 고명진은 전반 내내 중앙과 오른쪽 측면을 아우르는 넓은 압박 범위를 유지했다.

 

 

  이런 상황인 탓에, 포항은 중앙으로도 측면으로도 공격 전개가 어려웠다. 최전방을 향해 긴 패스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울산의 센터백들과 원두재가 번번이 제공권에서 이기며 공격권을 가져갔다.

  백쓰리를 모두 전문 센터백으로 세운 것이 포항 입장에서는 아쉬운 점이었다. 중원 싸움에서 밀리는 상황이라면 센터백 중 한 명이라도 과감하게 공을 몰고 올라가면서 울산의 수비에 빈틈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포항의 센터백들은 쉽사리 그런 시도를 하지 못했다.

 

  후반전, 김기동 감독은 왼쪽 윙백으로 출전했던 이광혁을 오른쪽 윙포워드 자리로 옮기면서, 포메이션을 4-2-3-1로 바꿨다. 윙어를 두는 진형으로 전환해 측면에서의 활로를 모색하는 모습이었다.

  울산은 기존의 4-5-1 형태를 유지하면서 수비 위치를 조금 낮추는 것으로 포항의 변화에 대응했다. 어느 팀이라도 90분 내내 압박 강도를 높게 유지하는 것은 무리한 선택이다. 게다가 포항의 측면이 윙백 한 명에서 윙어와 풀백 두 명으로 늘어났으니, 뚫릴 위험이 커진 측면으로 쏠리기보다 안정적인 수비 형태를 유지하려 했다. 대신 전반전과 마찬가지로 2선 자원들이 압박을 시도하는 모습이었는데, 특히 중앙의 고명진과 신진호가 주로 그 역할을 수행했다.

 

 

  고명진은 후반 24분, 벤치를 향해 직접 교체를 요청했다.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짐작컨대, 체력이 닿는 데까지 뛴 뒤 교체하기로 사전에 약속이 되어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후반 26분, 김도훈 감독의 승부수였던 고명진은 제 역할을 다한 뒤, 윤빛가람과 교체되어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예정과 다르게 이청용이 부상으로 고명진보다 먼저 교체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고명진의 고생이 의미를 잃었다고 평가할 순 없을 것 같다. 고명진이 70여 분간 보여준 공격적인 움직임과 헌신적인 수비 덕분에 울산은 경기 초반부터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교체 시점에 이미 두 골을 앞섰고, 실점은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고명진 기용의 결과는 대성공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전반전에만 골이 두 개래 골이 두 개래

 

  고명진 이야기를 하느라 지나치고 말았지만, 이번 경기를 리뷰하면서 이청용 이야기를 빼놓을 순 없다. 이청용은 전반전에만 두 골을 기록하며 자신의 첫 동해안 더비를 완승으로 이끌었다. 경기 이후 "동해안 더비는 '처음' 이청용을 경험했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올 정도로, 이청용은 이번 경기에서 활약했다.

 

  이청용은 평소처럼 오른쪽 측면과 중앙을 오가며 영향력을 과시했다. 동료가 움직이며 만들어준 공간을 이용해, 동료의 움직임에 맞춰 패스를 찔러주며 찬스를 만들었다.

  평소보다 눈에 띄었던 점은 이청용에게 공간이 꽤 넓게 주어진다는 점과, 이청용 또한 그런 공간에 적절하게 뛰어들어간다는 점, 그리고 그 공간에서 과감하게 슛을 시도한다는 점이었다. 포항의 미숙한 백쓰리 전술과 이청용의 오프 더 볼 움직임, 결정력이 맞물리며, 울산이 위협적인 찬스를 얻는 장면이 자주 연출되었다.

 

이 장면 이후에 이청용은 '어? 얘네 나 안 잡네?' 하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약 2분 후 이청용은 선제골을 기록한다.

 

  이청용의 첫 번째 골은 그 요소들이 제대로 맞물리며 나온 장면이었다.

  울산이 왼쪽 측면으로 공격을 전개하고, 측면으로 전진한 신진호가 그 공을 받아 크로스 패스를 시도했다. 신진호의 측면 이동으로 포항의 수비들은 대인 마크 상대를 바꿔야 했다. 윙백 심동운이 중앙 미드필더 신진호를, 오른쪽 센터백 김광석이 윙어 김인성을 맡게 되었다. 나머지 두 센터백들이 주니오를 견제했다. 여기까지는 적절하게 대처가 이루어진 것 같았다.

  문제는 반대편 측면이었다. 수비가 오른쪽으로 쏠리다 보니, 왼쪽에서마저 대인 마크가 어그러졌다. 순간적으로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침투하는 고명진을 왼쪽 윙백 이광혁이 견제하게 된 것이다. 포메이션 상 가장 왼쪽에 위치하는 이광혁마저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들어왔으니, 이제 포항의 왼쪽 측면은 텅 비어버리게 되었다. 주니오의 헤더가 골대를 맞고 튀어나왔을 때, 달려드는 이청용을 마크할 수 있는 포항 선수는 없었다.

 

  크로스 패스에 포항 수비 조직이 흔들린 장면이기도 하지만, 이청용의 움직임과 마무리가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했다. 이청용은 공이 골대에 맞자마자 공이 튀어나올 위치로 정확하게 뛰어들었고, 다이렉트 슛으로 정확하게 골문 반대편을 노렸다. 낮고 빠르게 깔아 찼던 임팩트도 일품이었다.

 

  이 골로 이청용은 3975일 만에 K리그 득점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이청용이 기록한 마지막 K리그 골은 2009년 7월 19일 강원전, FC 서울에서 뛴 마지막 경기에서 기록했던 결승골이었다.

 

 

  울산 이적 후 첫 골을 이렇게 중요한 경기에, 이리도 중요한 순간에 기록하다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청용의 대단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청용 본인은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것 같다. 11분 뒤, 이청용은 놀라운 플레이로 두 번째 골을 기록하며 울산의 2골 차 리드를 만들었다.

 

  오른발을 쓰는 선수가 오른쪽 윙어 포지션에서 뛴다면, 일반적으로 그 선수에게 기대하는 것은 측면 지향적인 플레이일 것이다. '일반적'의 범위를 조금 더 넓혀서 그 선수가 플레이메이커 유형의 선수라고 치자. 그래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습은 하프 스페이스에서 정면을 바라보고 스루 패스를 시도하는 것 정도다. 그러나 이청용은 이런 편협한 생각을 비웃듯이 멋진 골을 보여주었다.

 

  루즈 볼을 따낸 고명진이 오른쪽 측면을 향해 드리블하면서 시작된 장면이었다. 고명진은 이청용과 공을 주고받으며 포항의 수비를 측면으로 밀집시켰다. 근처로 접근하던 신진호가 전방으로 침투하며 이승모를 끌어내고 중앙 공간을 확보했다. 이청용이 그 공간을 향해 침투하며 2대1 패스를 받았다.

  팔로세비치의 태클을 피한 뒤, 중앙을 향해 공을 몰고 달리는 이청용을, 포항의 선수들은 아무도 저지하지 못했다. 이청용은 달리던 속도 그대로 몸을 완전히 틀어, 왼발 중거리 슛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앞을 가로막던 수비들이 무색해지는 골이었다. 몸의 방향을 급격하게 바꾸며 밸런스가 무너진 상황에서도 골문 구석을 노리는 정확한 슛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것도 왼발로 성공시키다니. 이청용의 클래스가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이청용이 K리그에서 마지막으로 멀티골을 기록한 경기는 2008년 7월 19일 전북전이었다. 이청용은 4340일 만에 본인의 K리그 멀티골 기록을 경신하며 스코어를 0:2로 벌렸다.

 

  후반전, 이청용은 포항의 프리킥 이후 세컨드 볼을 다투다, 최영준과 충돌하며 부상을 당했다. 충돌 장면 이후에도 다시 들어가 남은 경기를 소화하려 했으나, 결국 무릎 부위에 통증을 호소하며 교체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충돌 당시의 무릎 부상뿐만 아니라, 두 번째 골 장면에서 착지하며 발목에도 문제가 생겼었다고 한다.

  다행히 경기 다음 날, 울산은 기사를 통해 이청용의 부상 정도가 심하지 않다고 알렸다. MRI 촬영 등 정밀 진단 결과, 단순 타박 수준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울산 구단도, 울산 팬들도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울산은 다음 주부터 성남전, 강원전, 서울전을 토요일-화요일-토요일에 치러야 한다. 에이스 이청용의 부상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다. 이청용 선수의 빠른 회복을 기원한다.

 

 

 

이게 데뷔전이라고?

 

  앞서 선발 라인업을 살펴보며 언급했지만, 설영우는 이번 시즌 울산 현대에 입단해 프로 데뷔 경기를 동해안 더비로, 그것도 선발 출전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프로 첫 경기가 최대 라이벌과의 경기라니. 심지어 현대중-현대고를 거치며 울산 현대에서 유스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포항이라는 팀이 울산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모를 리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경기 설영우의 플레이에서는 부담감이 아닌 잠재력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설영우는 입단 전부터 팬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다. 포항 팬 입에서 '이 선수 이름을 너무 자주 들어서 궁금하다' 소리가 나왔으면 말 다 한 것 아닐까? 현대고에 대한 정보까지는 잘 알지 못했던 필자도, 설영우의 이름을 두세 번은 들어본 적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경기 전 선발 라인업이 발표되었을 때, 많은 울산 팬들이 당혹감을 표했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더비 매치에 신인 선수를 첫 출전시키는 것은 백보 양보해 그렇다 치더라도, 설영우가 왼쪽 풀백으로 나오다니.

  시즌이 시작되기 전 신인 선수 영입이 발표되었을 때부터, 당연히 최준이 왼쪽, 설영우는 오른쪽의 백업 자원이 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같은 오른발잡이에 풀백 포지션을 소화하는 선수라도, 왼쪽 측면에서 대외적으로 보여준 것(2019 FIFA U-20 월드컵 폴란드)이 있던 최준이 왼쪽 풀백으로 분류될 것 같았다.

 

  그런 놀라운 부분을 제외한다면, 김도훈 감독이 설영우 카드를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첫 번째는 압박 전술을 구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기 위해 4-1-4-1 포메이션의 2선 중앙에 공격형 미드필더 성향이 아닌 중앙 미드필더 성향의 선수가 필요했다. 전자에 가까운 이상헌 대신 후자에 가까운 고명진을 투입했다. 이상헌이 빠졌으니 다른 포지션에 U22 선수를 기용해야 했다.

  두 번째 이유는 지난 광주전 엄원상에게 돌파당하며 여러 번의 찬스를 내준 데이비슨의 수비력 문제였다. 포항이 팔라시오스를 기용할 것은 예상 가능했다. 만약 김기동 감독이 팔라시오스를 윙어가 아닌 일류첸코의 투톱 파트너로 쓰더라도, 오른쪽 측면으로 돌아 뛰는 역할을 맡길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 빠른 속도의 측면 공격수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던 데이비슨과 지난 시즌 K리그1·2를 통틀어 가장 빠른 선수로 꼽혔던 팔라시오스를 매치 업 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새로운 왼쪽 풀백이 필요했다.

  U22룰이 적용되는 풀백 자원. 설영우는 그 조건에 매우 적합한 선수였다.

 

  김도훈 감독은 설영우에게 자리를 지켜주고, 볼을 뿌려주고, 역습 차단에 주력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설영우는 교체되어 경기장을 빠져나올 때까지 김도훈 감독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울산이 측면 및 전방 압박을 수비 전술로 사용한 데다가, 2선의 압박을 넘어오는 공마저 중앙의 원두재, 불투이스, 정승현이 끊어주다 보니, 왼쪽 풀백 자리의 설영우가 짊어져야 할 수비 부담이 줄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설영우는 투지 넘치는 수비로 왼쪽에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

 

 

  수비 상황뿐만 아니라 공격 장면에서도 몸이 가벼운 모습이었다. 화려한 개인기로 상대 수비를 돌파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간결한 움직임으로 상대를 제쳐내려는 시도가 자주 보였다.

  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도 적절한 위치로 이동하면서 팀의 형태를 유지하는 모습이었다. 울산이 오른쪽 측면에서 공격을 진행할 때면 고명진과 신진호도 빌드 업에 참여하면서 포지션이 오른쪽으로 쏠리게 된다. 그런 장면에서 설영우가 중앙으로 좁혀 서서 중앙 미드필더들의 왼쪽 공간을 지켜주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이런 포지셔닝은 팀의 방향 전환을 가능하게 만드는 동시에, 빌드 업 도중 공 소유권을 잃었을 때 상대가 반대 공간을 이용해 쉽게 역습을 전개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물론 경기 중 신진호가 지속적으로 설영우에게 손짓 등 콜플레이를 하는 모습이 있었던 만큼, 이런 포지셔닝이 설영우 개인의 능력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긴장으로 정신없었을 첫 경기에서 이렇게나 제 역할을 잘 해내 줬다는 점만큼은 칭찬해주고 싶다.

 

 

  설영우는 이상헌과 같은 98년생이다. 즉, 이번 시즌이 U22룰의 적용을 받는 마지막 시즌이다. 프로 데뷔 시즌인 만큼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겠지만, 이번 시즌을 놓치면 다음 시즌에는 더더욱 출전 기회를 장담할 수 없다. 포지션은 다르지만 현대고 동기였던 이상헌과 U22 쿼터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한다. 이상헌뿐 아니라 최준, 박정인 등 현대고 후배들도 쟁쟁한 경쟁자들이다.

  첫걸음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번 경기 설영우의 선전으로 울산은 또 하나의 카드를 얻게 되었다. 이제 막 불붙기 시작한 이번 시즌 유망주들의 경쟁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도록 하자.

 

 

 

This is 김인성

 

  미디어 데이 설전, 팬들의 온라인 신경전 외에도, 이번 경기를 뜨겁게 달궜던 것이 있었다. 바로 김인성과 일오팔팔의 '그게 누군데요?' 이슈였다.

 

  시작은 김인성이었다. KBS 뉴스(인터넷 신문)의 영상 인터뷰에서 김인성은, "포항의 외국인 선수들 앞글자 따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일오팔팔이에요"라는 인터뷰어의 말에 헛웃음을 지으며 "처음 들어요. 일오팔팔이 뭐예요?"라고 되물었다. 뒤이어 "일오팔팔이고 뭐고, 우리 수비수들이 다 대단하기 때문에 충분히 잘 막을 수 있을 것이다."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 영상이 공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포항 측에서 이에 맞대응하는 영상을 구단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했다. 훈련 중인 포항의 네 외국인 선수들에게 "두유 노우 인성 킴?(Do you know INSUNG KIM?)"이라고 묻는 이 영상은 커뮤니티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익살스럽게 그게 누구냐고 되묻는 선수들의 모습에 포항 팬들은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다른 팬들은 더비가 흥미진진 해진다며 즐거워했다.

 

  이야기를 이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가자. 김인성은 포항의 외국인 선수들을 무시했던 것일까?

  KBS 뉴스에서 촬영한 인터뷰 영상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이런 장면이 있다. 포항의 전력에 대한 질문에 김인성은 포항의 외국인 선수들을 가장 먼저 언급하며, 그들이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로 대답을 시작한다. 그 뒤에도 포항이 조직적으로 잘 갖춰진 팀이라고 평한 뒤, '하지만 결과를 꼭 가져오고 싶다'라고 더비 매치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밝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 직후에 이어진 것이 '일오팔팔을 아는지'에 대한 인터뷰어의 질문이었다. 아직도 김인성이 포항의 외국인 선수들을 무시했던 것으로 보이는가?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김인성은 '두유 노우 인성 킴?' 영상을 경기 당일이 되어서야 봤다고 한다. 그것도 경기 당일 아침에 구단 직원이 카카오톡 메신저로 해당 영상의 링크를 보내줬다고 스포츠니어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영상을 확인한 김인성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 감정을 플레이로 승화시켰다. 후반 28분, 김인성의 골이 터졌다. 주니오가 아웃사이드로 띄워준 공을 발에 정확히 맞혀 골문을 갈랐다. 김인성의 집중력이 돋보이는 골이었다.

 

팟캐스트 '주간K리그'에 따르면, 이 장면에서 주니오의 킥은 슛이 아닌 패스였다고 한다.

 

  골을 기록한 뒤, 김인성은 본인의 등에 마킹된 자신의 이름을 가리키는 셀러브레이션을 선보였다.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든 아니었든, 자신을 조롱했던 포항과 포항의 외국인 선수들에게 먹이는 김인성의 통쾌한 한 방이었다.

 

모르면 배워라!

 

  김인성은 점점 왼쪽 윙어 자리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 지난 시즌만 해도 팀의 빌드 업에 제 몫을 하지 못하고, 측면 지향적인 움직임 때문에 왼쪽 풀백의 오버래핑만 곤란하게 만드는 듯 보였던 김인성이다.

  이번 시즌 울산은 왼쪽 풀백을 중앙의 연계에 자주 참여시키고 있다. 김인성은 여전히 팀의 빌드 업에 관여하기보다 측면 지향적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경기를 보다 보면 울산의 왼쪽 공격이 오른쪽에 비해 날카로움이 떨어지는 것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우습게도, 김인성은 그런 착각이 상대 팀에게도 만연해졌을 즈음 뜬금없이 나타나 골을 기록한다. 상대 시야 밖에서 튀어나와 기록한 골이 수원전에 이어 벌써 두 번째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자신에게 올 단 한 번의 기회를 기다리며 경기 내내 수비 부담을 짊어지는, 김인성의 플레이는 그 사자성어와 닮아있다. 지난 시즌 수모를 딛고 다시 한번 우승을 노리는 울산, 그런 울산의 마음가짐과 가장 가까운 선수가 바로 김인성이지 않을까?

 

 

 

울산의 다음이 더 기대되는 이유

 

  이번 라운드에 라이벌을 상대로 막강한 모습을 보여준 울산이지만, 울산 팬들은 아직도 팀이 보여주지 않은 모습에 기대감을 품고 있다. 주니오의 마지막 골 또한 그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

 

 

  부상으로 4라운드까지 출전 명단에서 이름을 볼 수 없던 박주호는, 이번 경기 교체 투입되어 10분 남짓의 짧은 시간을 뛰고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을 지켜내는 능력은 그대로였고, 공격 상황에서의 움직임은 오히려 지난 시즌보다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이다. 주니오가 기록한 마지막 골은 박주호의 적극적인 공격 가담이 만들어낸 장면이나 마찬가지였다.

 

  박주호가 이 정도 모습을 보여줬다면, 다음으로 기대되는 것은 이근호다. 작년 12월 무릎 수술 이후 5개월에 걸친 재활 끝에, 최근 연습경기에 출전하며 조금씩 경기력을 올리고 있다.

  물론 이근호와 박주호에게 풀 타임 출전을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일 것 같다. 하지만 베테랑들이 시즌 순간순간 등장해 활약해준다면, 울산에게는 또 하나의 위력적인 조커 카드가 될 수 있다.

 

  베테랑들뿐만 아니라, 젊은 선수들도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4골이나 터진 탓에, 골 위주로 리뷰를 진행하느라 언급하지 못했지만, 원두재도 이번 경기에서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울산의 전방 자원들이 두려움 없이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은, 원두재가 넓은 활동 범위로 후방을 지켜준 덕분이다. 이 날 원두재는 18회의 볼 획득을 기록했고 이는 양 팀 모든 선수 중 최고 수치였다.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리그 개막 이후 처음으로 교체 명단에 이름을 올린 정훈성도 있다. 육상부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빠른 선수들이 즐비한 울산에서, 이 왼발잡이 윙어가 어떤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성남의 유망주 홍시후가 '한국의 아다마 트라오레'라는 별명을 노리고 있다. 누가 그 별명의 원조인지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이 남자... 너무 멋있다.

 

  경기 직후 감독 기자회견에서 김도훈 감독은, 준비해온 메모지를 펼쳐 들고, 평소보다 격양된 듯한 목소리로 경기 소감을 밝혔다고 한다. 김도훈 감독이 지난 시즌의 복수를 얼마나 바라 왔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김도훈 감독은 시즌 첫 동해안 더비에서 지난 시즌과 다른 경기 내용, 다른 경기 결과를 만들어냈다.

  과연 김도훈 감독은 이번 시즌 전체에서도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동안 미워했던 만큼, 달라진 그리고 달라질 김도훈 감독의 모습에 응원과 지지를 보내고 싶다.

 

  울산의 다음 라운드 상대는 이번 시즌 기대 이상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빠다볼' 성남이다. 성남은 광주, 서울을 잡아내며 무패 행진을 달리다, 5라운드에 대구에게 발목을 잡히며 시즌 첫 패배를 기록했다. 경기 후 김남일 감독의 표정이 두려움을 느낄 만큼 좋지 않았다고 한다. 울산 홈에서 열리는 경기인 만큼 울산에게 유리해 보이는 상황이지만, 김남일 감독과 정경호 코치는 분위기를 뒤집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해올 것으로 예상된다. 선수들과 김도훈 감독이 잘 준비해서, 8일 동안 치르는 3경기의 시작을 좋은 결과로 만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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