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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년이나 기다려왔던 우승. 울산은 지난 시즌, 드디어 고대하던 영광의 순간을 이뤄냈다. 열 번의 아쉬움, 3년의 눈물 끝에, '모든 걸 이겨낸 우리'였다. 최근 10년 중 가장 행복했던 겨울을 지나 새로운 시즌, 울산은 도전자의 입장으로 돌아와 다시 한번 정상을 바라고 있다.

  2월 25일 개막전 현대가 더비 역전승을 시작으로, 울산은 4경기를 치러 단 1점의 승점도 놓치지 않았다. 현 시점 리그 유일의 전승 팀. 이보다 더 좋은 흐름이 있을까? 결과만 두고 생각하면 압도적인 패자(霸者)처럼 보인다. 하지만, 울산 팬들은 대부분 마음 한 구석에 웅크린 걱정을 떨쳐버리진 못했을 것이다. 1~3라운드의 아슬아슬했던 내용 때문이었다.
  1라운드 현대가 더비는, 원체 빡빡한 라이벌 매치다. 이번 시즌도 어김없이, 많은 이들이 울산 혹은 전북의 우승을 예측한다. 두 우승 후보의 맞대결이니 당연히 아슬아슬하고 팽팽한 경기일 수밖에. 하지만 이어진 2라운드 강원전, 3라운드 서울전까지도, 울산은 시원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강원전은 엄원상의 선제골을 육탄방어로 지켜낸 신승이었고, 서울전은 상대 골키퍼의 실수가 아니었다면 무승부로 마무리될 뻔했던 경기였다. 꾸역승이든 뭐든 승리를 따내는 게 강팀이라는 말을 위안으로 삼고는 있었지만, 이런 경기 내용이 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팬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두 번의 원정 경기를 마치고 돌아온 홈경기, 울산에게 수원 FC와의 4라운드는 그래서 더 중요했다. 안방에서 치러지는 경기이니만큼 반드시 이겨야 했고, 내용 측면에서도 더 나은 모습을 보여야 했다.

  결과부터 이야기하면, 울산은 3:0의 대승을 거뒀다. 3골보다 더 많은 득점이 터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경기였다. 경기력 측면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완승이라는 평이 많았던 만큼, 필자도 울산 팬의 한 사람으로서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경기였다. 3라운드까지의 울산과 이번 경기의 울산은 무엇이 달랐을까? 2·3라운드와 무엇이 달라 "울산 XX 세다."라는 평을 들을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필자가 '그래도 안도할 수 없다'는 제목을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 경기를 천천히 되짚으며 생각해 보자.

 

이규성 대신 보야니치, 바코 대신 루빅손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선발 라인업을 구성한 선수들의 면면이었다. 지난 세 경기에서 찬스를 놓치며 ‘부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던 바코가 선발 명단에서 제외되고, 그 자리를 루빅손이 대신했다.
  사실 바코 대신 루빅손을 선택한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루빅손은 지난 세 경기에서 적극적인 태도와 성실한 활동량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개막전이었던 현대가 더비에서 결승골을 기록한 것도 그였다. 바코는 여전히 울산의 핵심적인 선수지만, 경쟁 없이 선발 출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선수는 없다.

  루빅손의 선발 출전보다 더 주목을 받았던 것은 보야니치의 선발 출전이었다. 보야니치는 개막 후 세 라운드가 지나는 동안, 단 한 번도 명단에 들지 못했다. 몇몇 울산 팬들은 지난 시즌의 마크 코스타를 언급하며 이번에도 실패한 영입이 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보야니치는 4라운드 만에 경기에 출전했고, 상당히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다.
  보야니치의 플레이 스타일은 울산의 어느 중앙 미드필더 자원과도 달랐다. 플레이 템포와 시야, 공을 다루는 기술이 눈에 띄게 우수한 모습이었다. 상대의 압박에서 벗어나야 할 순간에는 간결한 템포의 원터치 패스로 동료들을 활용했고, 상대의 수비 진형에 균열이 생겼다는 판단이 들 때면, 수비와 수비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찔러 넣는 패스도 성공하는 모습이었다.
  ‘볼 진짜 잘 찬다...’ 하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커뮤니티 반응을 보니, 울산 팬들도 걱정을 내려놓은 듯하다. 스탠딩석에서 경기를 관람했던 필자도, ‘저 길을 본다고?’ 하며 놀랐던 장면이 많다. 그러나, ‘보야니치의 가세가 울산의 화룡점정이 될 것이다.’라는 말에, 필자는 절반은 고개를 끄덕이고, 절반은 고개를 기울일 것 같다.

  좁은 공간에서도 공을 전진시킬 길을 찾는 시야와, 상대의 압박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간결함은 울산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 분명하다. 지난 시즌, 울산은 강한 전방 압박으로 후방 빌드업을 방해하는 상대에게 고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보야니치의 강점들은 그 해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 득이 있으면 실이 있고 강점이 있다면 약점도 있는 법이다. 아틀란틱 컵 중계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보야니치의 수비 상황 활동 범위를 약점으로 지적했었다. 아무리 공격 전개 능력을 보고 기용을 했더라도, 3선에서 뛰는 수비형 미드필더라면 어느 정도의 수비 능력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보야니치의 수비 범위는 상당히 좁아 보였다. 경기 중 4-1-4-1 진형과 4-2-3-1 진형을 오가는 울산의 중원 구성을 고려했을 때, 3선 파트너가 보야니치에게 뒤를 맡기고 전진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리고 이번 경기에서도 그 약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 보였다.
  거기에 더해, 공격 장면에서도 보야니치는 정적인 편이었다. 물론, 앞서 언급했던 플레이 템포와 기술적인 우수함으로 그 약점을 보완한다. 하지만, 그 방식이 이규성처럼 상대 압박을 이겨내고 볼을 지켜내며 전진 패스를 시도하는 형태는 아니었다. 보야니치가 상대 압박을 피하는 방식은 볼 터치를 최소화해 상대 압박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겨낸다는 표현보다 흘려낸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패스를 활용한 보야니치의 탈압박은 유연해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탈압박 방식은 사실, 동료들의 희생이 필요하다. 빠른 템포의 간결한 패스는 결국, 받는 사람도 그 템포에 맞춰 준비해야 완성된다는 것이다.

  리뷰를 위해 이번 경기를 다시 보며 느낀 점은, 이번 경기 울산의 선수 구성이 보야니치를 위해 만들어진 맞춤옷 같다는 것이었다. 구단 공식 SNS 계정에 업로드된 선발 라인업 이미지와 달리, 실제 경기에서 보야니치는 3선의 왼쪽 포지션이었다. 그 포지션 주변에서 뛴 선수들의 면면을 보자.
  우선, 2선에는 루빅손과 김민혁이 있었다. 루빅손과 보야니치는 지난 시즌까지도 함마르뷔에서 함께 발맞춰 왔다. 아무래도 익숙한 동료와 가까운 위치에서 뛴다면 조금이나마 적응에 도움이 될 것이다. 코칭스태프들도 분명 그 점을 노렸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루빅손과 김민혁은 울산 선수들 중에서도 눈에 띄게 활동 범위가 넓고 활동량이 많은 2선 자원이다. 보야니치의 스루패스 능력을 살려줄 수 있는 활발한 침투는 물론이고, 정적인 보야니치의 탈압박을 위해 공을 받으려는 움직임을 생각했을 때도 궁합이 맞다.
  그리고 후방에는 설영우가 있었다. 설영우는 많은 활동량과 공수 밸런스에 강점을 가진 풀백 자원이다. 오른발잡이지만, 그동안 왼쪽 측면 수비수 자리에 출전하면서 후방 빌드업 가담에도 익숙하다. 보야니치의 약점을 가려주기 위한, 보야니치를 기용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들이 보야니치를 둘러싸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든다.
  선수 구성뿐만이 아니다. 심지어는 기존의 주전자원마저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뛰고 있었다. 울산 3선 부동의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라고 볼 수 있는 박용우에 대한 이야기다. 박용우는 이번 경기에서, 겉보기에도 평소보다 많이 뛴다 느껴질 정도의 활동량을 보였다.

(좌) 박용우의 3라운드 패스 시도 (우) 박용우의 4라운드 패스 시도 (출처: K리그 데이터 포털)

  아쉽게도 K리그 데이터 포털에서는 뛴 거리에 관련된 데이터를 확인할 순 없다. 하지만, 드리블보다 패스를 선호하는 박용우의 플레이 스타일을 고려했을 때, 패스 데이터를 통해 간접적이나마 활동량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3라운드 서울전과 비교해 보자. 그 경기에서 박용우는 98분을 뛰며 80개의 패스를 성공시켰고, 82%의 패스 성공률을 기록했다. 패스 성공률을 통해 역산해 보면, 97개 내외의 패스를 시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보야니치의 파트너로 뛰었던 이번 경기는 어떨까? 박용우는 이번 경기에서 97분간 뛰면서 110개의 패스를 성공시켰고 93%의 패스 성공률을 기록했다. 역산하면 118개 내외의 패스 시도 추산치가 나온다. '일단 공을 받았어야 패스를 시도하지'. 패스 시도 기록은 동료에게 패스를 받은 횟수로도 생각할 수 있다. 단순히 스탯만 비교해 봐도, 이번 경기 박용우는 서울전에 비해 동료에게서 공을 받아준 횟수가 스무 번은 더 많았다.

  현실적으로 현재 울산에서 보야니치의 입지는 백업 자원 정도이다. 이규성과 박용우가 확고한 주전의 위치를 지키고 있고, 이청용도 종종 박용우와 함께 3선 위치에 선다. 보야니치는 그다음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규성의 대체자'다. 현재까지 보여준 모습으로는, 보야니치가 박용우를 대체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보야니치를 기용하려면 옆자리에 박용우를 기용해야 하는데, 그때 박용우는 이규성과 함께 출전할 때보다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 체력 소모가 그만큼 심해진다는 이야기다.
  박용우의 체력 소모만 문제인가? 아무리 최근 폼이 좋지 않다고 해도, 울산의 주전 왼쪽 윙어는 바코다. 바코는 루빅손에 비해 정적이다. 상대 수비라인을 밀어낼 수 있는 침투 움직임보다는 발 밑으로 공을 받아 드리블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바코와 보야니치가 함께 기용되었을 때, 울산의 왼쪽 공격이 제 기능을 할 수 있을까?
  팀의 핵심 공격수와의 케미스트리를 기대할 수 없고,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의 체력을 갉아먹어야만 제 몫을 할 수 있는 백업 미드필더라니, 계륵이 따로 없다. 개인적인 평가로는, 보야니치가 다음 출전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발전해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다.

 

이번 경기력은 우연의 일치일 수 있다.

  이번엔 수원 FC의 공격 방식을 돌아보자. 이번 경기에서 수원은 오른쪽 측면을 활용해 공격을 풀어나가고자 하는 경향이 짙었다. 이용, 이광혁, 무릴로 등의 기술적인 선수들이 오른쪽에 배치되어 공 점유를 유지하고, 왼쪽의 박철우나 오인표 등의 선수들은 좀 더 직선적인 움직임을 가져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공교롭게도 울산은 보야니치를 활용하기 위해 왼쪽 측면에 수비 가담이 많은 루빅손과 설영우를 배치한 상태였다. 물론 보야니치의 늦은 수비 복귀는 허점이 될 수도 있는 약점이었지만, 박용우가 부지런히 뛰며 그 자리를 메웠고, 루빅손은 거의 윙백처럼 내려가 왼쪽 측면을 틀어막았다. (실제로 경기 영상을 확인해 보면, 수비 상황에 루빅손이 보야니치보다 훨씬 낮은 위치에 내려가 있는 경우가 많다.) 수원 FC의 공격 작업은 번번이 차단되어 울산의 역습 기회가 되었다. 이것이 '울산이 경기를 지배했다' 느끼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마치며

  위의 이유들 때문에, 아직까지도 울산의 경기력에 대해 마음을 놓진 못할 것 같다. 자만은 금물이다. 리그는 아직 34경기나 남았다. 경기 내용에 대한 만족보다, 시즌 첫 다점차 승리를 이뤄냈다는 분위기, 선발로 출전해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루빅손, 아타루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좋은 모습 보여준 김민혁, 연속 골 행진에 시동을 건 주민규, 무실점에 혁혁한 공을 세운 수비진과 조현우 정도만 남기고 다시 한번 심기일전하는 자세로 다음 라운드를 준비하자. 남기는 게 너무 많은가 싶긴 하지만, 요는 방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휴식기를 알차게 보내고, 다음 라운드도 연승 행진을 이어나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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