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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ukee, wir vertrauen dir(Lukee, 우린 널 믿어). 문수구장에 서포터들의 메시지가 담긴 새 횡단막이 걸렸다. 그리고 전반 20분, 그 횡단막의 주인공 루카스 힌터제어가 드디어 울산에서의 첫 골을 성공시켰다. 스포츠 영화 같은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낸 경기였다.

  힌터제어의 마수걸이 골에 힘입어, 울산은 광주에게 2:0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최근 3경기 무득점으로 승점을 잃던 와중이라 반드시 승리해야 했던 중요한 경기였고, 지난 2라운드 광주전의 진땀승을 떠올렸을 땐 걱정도 되는 경기였다. 이번 경기를 승리하며 전북과의 승점 격차도 줄일 수 있었으니, 여러 의미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다.

 

  좋은 결과에 좋은 점을 하나 더 얹어보자. 울산은 경기 내용 측면에서도 매우 긍정적인 장면을 많이 만들었다. 그동안 안 풀렸던 부분에는 적절한 개선이 있었고, 상대의 전략을 무너뜨리기 위해 준비해온 전술적인 요소들이 하나하나 들어맞으며 경기를 잡아냈다. 오늘 리뷰에서는 양 팀의 전술적 콘셉트들을 살펴보고, 울산이 어떻게 광주를 공략해냈는지 설명해보려 한다.

 

 

 

선발 라인업의 메시지

 

  광주의 김호영 감독은 경기 중 선수 교체를 하더라도 자신의 전술 콘셉트를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김호영 감독의 이러한 성향은 90분의 한 경기뿐만 아니라, 경기와 경기를 비교할 때도 드러난다. 이번 경기에서도 김호영 감독은 지난 경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선발 라인업을 준비했다.

 

 

  직전 경기였던 12라운드 대구전 선발 라인업과 비교했을 때, 김봉진 대신 이순민을 기용한 것만이 달랐다. 10라운드 포항전과는 선발 출전한 모든 선수가 같았다. 이번 경기에서도 자신들이 하던 축구를,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축구를 하겠다는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

 

  울산의 선발 라인업을 확인했을 때 가장 의외였던 점은, 김인성과 이동준이 모두 선발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이었다. 광주는 강도 높은 전방 압박과 빠른 수비 전환, 지역 방어 상황에서의 측면 압박이라는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팀이다. 이런 팀과의 경기를 준비할 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해법은 폭발적인 스피드를 가진 공격수의 기용이었을 것이다. 전방 압박을 시도할 때는 필연적으로 수비 라인을 끌어올려야 한다. 광주의 높은 수비 라인, 그 배후 공간을 노리는 역습은 홍명보 감독에게도 매력적인 선택지였을 것이다. 상대의 수비 전환 속도가 아무리 빠르더라도, 리그에서 스피드로 손꼽히는 울산의 측면 공격수들은 제 몫을 해낼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홍명보 감독은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 김인성과 이동준을 벤치에 앉히고, 고명진을 시즌 처음으로 선발 출전시켰다. 고명진, 원두재, 바코, 윤빛가람이 한꺼번에 이름을 올린 울산의 선발 라인업은 어느 모로 보나 역습보다 지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금까지 울산의 공격은 측면에 집중되어 있었다. 측면 공격수 김인성과 이동준이 각각 4골씩을 기록하며 팀 내 득점 공동 선두에 올라 있고, 중앙 공격수 김지현과 힌터제어가 무득점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편중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다. 김지현과 힌터제어의 무득점 기록은 12경기 동안 이어졌고, 마침내 언론에서도 이 둘을 주니오에 비교하며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 시즌 울산의 경기들을 톺아보다 보면, 이 문제가 단순히 두 공격수의 컨디션 부진에 기인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울산의 공격 루트는 실제로 측면에 편중되어 있었다. 특히 지공 상황에서 중앙으로 공격을 전개하는 빈도가 너무 낮았다. 전술상의 문제였다.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한 명이 후방 빌드업을 위해 낮은 위치로 내려오면서, 공격 방향을 선택하는 단계에서 중원의 머릿수가 부족해지는 탓이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다른 포지션에 있던 선수가 미드필더들을 지원해줘야 했다. 주로 중앙 공격수가 패스를 받기 위해 내려오곤 했다. 그럴수록 중앙 공격수와 골문의 거리는 멀어졌고, 자연스레 결정적인 기회가 중앙 공격수에게 돌아가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홍명보 감독도 이 문제를 두고 고민했던 것 같다. 이번 경기처럼 기술적인 미드필더를 네 명이나 중앙에 배치해놓으면, 중원에서 수적 열세에 놓일 걱정을 덜 수 있다. 미드필더만으로 중원 장악이 가능하다면, 중앙 공격수가 빌드업을 돕기 위해 굳이 내려올 필요가 없다. 중앙 공격수에게 공격수 본연의 임무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전반전 초반부터 효과를 보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오랜만에 선발 출전한 스트라이커, 힌터제어는 멋진 선제골으로 홍명보 감독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광주를 효과적으로 공략한 울산

 

  앞서 광주의 김호영 감독을 '어떤 상황에서도 뚝심 있게 자신의 축구를 밀어붙이는 감독'처럼 묘사해두긴 했지만, 전반전 광주의 모습은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한 듯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평소 광주는 매우 높은 위치에서부터 전방 압박을 시도하곤 했는데, 이 날 경기에서는 지역 방어의 비중을 늘린 듯했다. 펠리페까지 하프 라인 아래로 내려와, 4-4-2 형태로 수비하는 장면이 많았다. 이는 이번 경기의 변수들에 대응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광주전 리뷰에서 타 구장에 비해 좁은 광주축구전용구장의 필드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문수축구경기장의 필드는 광주축구전용구장에 비하면 매우 넓다. 필드의 물리적인 면적이 넓으면 공격하는 팀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지고 많아진다. 그리고 그런 만큼, 그 공간을 커버하기 위한 수비하는 팀의 이동 거리도 늘어난다. 측면 수비를 위해 움직일 때도 몇 걸음을 더 움직여야 하고, 전방 압박을 위해서 전진할 때도 마찬가지다. 섣부르게 전방 압박을 시도하다 실패한다면 그 뒤의 공간이 너무 넓다. 가뜩이나 기술적인 선수들이 많은 울산과의 경기였다. 기술적인 선수들이 넓은 공간에서, 그것도 최전방의 압박을 벗겨낸 중원 지역에서 여유롭게 공을 다루게 되는 것은, 광주 입장에서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전방 압박을 시도한다면 뛰어야 하는 거리가 늘어난 만큼 체력적인 소모도 클 것이었다. 특히 광주의 공격수들은 최근 경기에서 지속적으로 선발 출전해왔으니 더욱 부담되는 선택지였다. 결국 광주는 팀컬러와 같은 전방 압박을 일정 부분 포기했다. 대신 측면 압박의 강도는 유지하려 했다.

 

  울산은 미들 서드에 진입했을 때 측면 지역을 활용해 공격을 전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울산 입장에서는 광주의 측면 압박을 어떻게 풀어내고, 위협적인 중앙 지역으로 공격을 이어나갈지가 관건이었다. 이번 경기를 위해 울산은, 몇 가지 콘셉트를 준비해온 듯했다. 반복적으로 보였던 세 가지 유형의 비슷한 장면들이 있었다.

 

 

1. 김태환의 얼리 크로스

 

  오른쪽 풀백으로 출전한 김태환은 공격 가담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동준이 없는 오른쪽 측면 지역은 오롯이 김태환의 몫이었다. 울산의 후방 빌드업이 시작되는 시점이면, 김태환은 이미 2선에 가까울 정도로 올라가 있었다.

  사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알던 김태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평소와 달라 눈에 띄었던 점은 그 이후의 퍼포먼스였다. 이번 경기에서 김태환은 평소처럼 공을 받아 코너 플래그 근처로 전진하는 대신, 낮은 위치에서 얼리 크로스를 자주 시도했다.

 

  광주의 측면 압박은 풀백과 윙어의 맨 마킹에 수비형 미드필더가 가세하며 중앙을 향한 패스 길을 가로막고, 측면 지역의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상대 윙어와 풀백의 연계를 방해하는 형태다. 당연히, 골라인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간격을 좁혀가며 압박의 강도를 올린다.

 

  김태환이 얼리 크로스를 시도했던 위치는, 광주 입장에서 굉장히 애매했다. 광주가 측면 압박을 시작할 만한 정도의 위치에서, 압박을 시작하기도 전에 크로스를 연결해 버리면서 광주의 수비 전략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꼴이었다. 또, 낮은 지역에서 단번에 최전방으로 공이 전달되기 때문에, 광주가 골문 앞의 수비 간격을 좁히기 이전에 힌터제어에게 슛 찬스를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이 시도는 결국 힌터제어의 선제골로 이어졌다.

 

전반 20분, 힌터제어의 골로 이어진 김태환의 얼리 크로스

 

 

 

2. 바코를 위한 공간 창출

 

  김태환이 오른쪽 측면 지역의 윙 플레이를 담당했다면, 왼쪽 측면은 어땠을까? 홍명보 감독은 지난 전북전에 부상을 당한 홍철 대신, 설영우를 왼쪽 풀백 포지션에 세웠다.

  설영우에게 왼쪽 풀백은 그다지 어색한 역할이 아니다. U22 선수로 활용됐던 지난 시즌에도 설영우는 왼쪽 풀백으로 곧잘 뛰었었다. 그러나 왼쪽에서 뛰는 설영우에게 정교한 얼리 크로스를 기대할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조금 힘든 일이다. 아무래도 왼발은 익숙하지 않아 정교함이 떨어지고, 오른발로 크로스를 시도하기 위해서는 중앙을 바라볼 수 있도록 공을 한 번 컨트롤해 두어야 한다. 패스를 받았을 때부터 크로스를 시도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오른쪽 측면에서 오른발을 사용하는 김태환보다 길 수밖에 없다. 광주의 측면 압박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던 얼리 크로스를 왼쪽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설영우의 전후반 패스 기록.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을 향한 크로스 시도는 1회가 다였다.(자료 출처: K리그 데이터 포털)

 

  실제로 이 날 울산의 왼쪽은 오른쪽에 비해 크로스를 시도하는 빈도가 현저히 낮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울산이 왼쪽 공격을 아예 포기했던 것은 아니었다. 울산은 왼쪽 측면으로 공격을 진행할 때, 하프 스페이스의 바코를 적극 활용했다.

 

  이 날 윤빛가람은 상대 진영 전역을 누비며 공격에 기여했다. 바코 이야기를 할 것 같더니 갑자기 윤빛가람 이야기를 꺼내 의아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바코의 전반전 활약에는 윤빛가람의 기여가 매우 컸다. 윤빛가람이 왼쪽 측면 근처에 있고 울산이 왼쪽으로 공격을 시도할 때면, 윤빛가람은 영리한 움직임으로 바코를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광주의 기본적인 수비 콘셉트는 4-4-2 형태의 지역 방어였다. 이러한 형태에서는 오른쪽 풀백이 상대 왼쪽 윙어를, 오른쪽 윙어가 상대 왼쪽 풀백을 마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번 경기로 치면, 풀백 이지훈이 윙어 바코를, 윙어 엄지성이 풀백 설영우를 마크해야 했다. 그런데, 중앙에 있어야 할 윤빛가람이 자꾸 왼쪽 측면 지역으로 와 맨마킹 체계를 흐트러뜨리고 수비 블록에 틈을 만드는 것이다. 설영우가 마크맨 엄지성을 데리고 움직이는 와중에 갑작스레 윤빛가람이 왼쪽 측면으로 침투하는 장면이 종종 연출되었다. 이 움직임에, 바코를 견제해야 할 이지훈 혹은 수비 라인 앞을 지켜줘야 할 수비형 미드필더가 딸려 나가고, 결과적으로 바코는 그 빈 공간에서 유유자적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전반 14분, 윤빛가람이 이순민을 끌고 나온 뒤, 넓은 공간에서 패스를 받는 바코

 

  좁은 공간에서도 드리블과 패스, 슛으로 놀라운 장면을 만들어내는 바코에게, 넓은 공간까지 주어지면 어떨까? 그런 상황은 곧 결정적인 장면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아쉽게도, 윤빛가람이 만들어준 공간을 활용해 바코가 골을 만들어내는 장면까지는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윤빛가람의 영리한 움직임과 위협적인 바코의 존재로, 울산은 좌우 균형을 맞춰 공격을 전개할 수 있었다.

 

 

3. 고명진의 후방 주의 빌드업

 

  홍명보 감독은 네 명의 중앙 지향적 미드필더들을 기용해 중원 장악력을 높이고, 중앙 공격의 활로를 모색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울산의 공격 전개는 눈에 띄게 유연해졌고, 울산의 미드필더들은 측면을 향한 패스뿐만 아니라 중앙, 수비 사이를 노린 패스도 쏠쏠하게 성공시켰다.

  울산 중원의 극적인 변화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선수를 꼽으라면, 단연 고명진이었다. 고명진은 넓은 활동 범위와 지속적인 움직임으로 팀 동료들을 지원했다. 원두재의 후방 빌드업 파트너일 때도 있었고, 윤빛가람과 비슷한 높이까지 올라가 공격 마무리 작업을 돕기도 했다. 팀 공격의 포문을 열었던 첫 번째 슛도 고명진이었다. 그만큼 고명진은 이번 경기 전반에서 영향력을 드러냈고, 멋진 장면들을 여럿 만들었다.

  만약 그래도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을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필자는 후방 빌드업을 이끌었던 모습들이 가장 대단했다고 말하고 싶다. 팀이 공격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고명진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섹시하다 말하고 싶을 정도로 유려했다.

 

  울산이 후방 빌드업을 진행할 때, 고명진은 3선, 특히 오른쪽 측면 후방 지역에서 빌드업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명진이 해당 위치로 가면서 울산이 얻을 수 있었던 공격적인 메리트는 크게 두 가지였다.

 

고명진의 광주전 히트맵. 오른쪽 후방 지역이 눈에 띈다.(자료 출처: SofaScore)

 

  우선, 김태환이 부담 없이 높은 위치까지 전진할 수 있었다. 빌드업 상황에서의 위치 선정에는 공격 전개 방향의 선택지를 확보하는 것뿐만 아니라, 만에 하나 빌드업에 실패했을 때의 역습 상황에 대비하는 의미도 있다. 고명진이 배후 공간을 커버하고 있으니, 수비수 김태환이 높이 전진하더라도 팀이 안정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원두재의 공격적인 재능을 다시금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도 메리트였다. 그동안 원두재는 윤빛가람이나 이동경, 바코처럼 공격적인 성향의 미드필더와 함께 중원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면 아무래도 파트너의 공격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원두재가 수비적인 역할을 떠맡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윤빛가람과 원두재가 함께 뛸 때 볼 수 있는 후방 빌드업 형태가 단적인 예다. 윤빛가람의 위치는 후방 빌드업 단계에서부터 이미 원두재보다 높을 때가 많았다. 심지어는 아예 상대 진영 깊숙한 위치에 미리 올라가 패스를 기다리는 경우도 꽤 자주 보였다. 원두재의 안정감을 믿고 더 공격적인 위치를 선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원두재의 공격적인 재능이 희생되는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센터백들과 함께 최후방 빌드업을 책임져야 하는 원두재로서는, 도전적인 시도보다 안전한 패스 처리를 우선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경기는 달랐다. 후방 빌드업이 진행될 때마다 고명진이 낮은 위치에서 원두재와 함께했다. 그 덕분에 원두재가 시도할 수 있는 퍼포먼스의 가짓수도 늘어났다. 일단 고명진이라는 안정적인 패스 선택지가 생겼다. 그리고 지난 시즌에 간혹 보여줬던, 직접 공을 몰고 전진하는 드리블도 오랜만에 보여줄 수 있었다. 원두재가 전진하더라도, 유사시 센터백을 보호해줄 고명진이 뒤에 남아 있으니 할 수 있는 플레이였다.

 

  사실 팀 동료들에게 안겨준 메리트들을 떼어놓고 보더라도, 고명진이 보여준 후방 빌드업 과정은 그 자체로도 매력적이었다. 동료 주변으로 지속적으로 움직이며 공을 연결시키는 고명진의 움직임 덕분에 팀의 빌드업이 매우 안정감 있게 진행될 수 있었다.

  특히 윤빛가람, 원두재와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짧은 패스를 여러 번 주고받다, 적절한 순간에 불투이스를 향해 방향 전환을 시도했던 장면들은 고명진의 클래스를 느끼게 만들었다. 시간을 소모하는 척 상대 수비를 오른쪽 측면으로 몰아 반대편에 공간을 창출하고, 그 공간으로 공을 보내 상대 수비 진형을 흔드는, 매우 효과적인 공격 전개였다. 마치, 진짜 후방 빌드업은 이런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고명진이 가지고 있는 기술에 대한 자신감과 넓은 시야, 판단력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전반 19분, 수비 블록을 끌어당겨 공간을 창출하는 고명진

 

  아무리 생각해도, 달리 어떤 표현으로 고명진의 플레이를 이야기하는 게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이번 경기에서 고명진은 그냥, 축구를 너무 잘했다.

 

 

후반전 울산: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트

 

  울산은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이동경을 교체 투입했다. 오른쪽 윙포워드로 뛰던 김민준과의 교체였다. 다른 선수들의 변화가 크게 눈에 띄지 않았으니, 이동경 또한 오른쪽 윙어 포지션 그대로 투입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후반전이 시작되고 볼 수 있었던 광경은 예상과는 달랐다. 김태환과의 연계 플레이를 보여줄 것 같았던 이동경은, 오히려 오른쪽 측면에서 활동하는 장면이 드물었다. 이동경의 위치 선정과 움직임은 어느 포지션으로 뛰고 있는 건지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로웠다. 특히 바코의 쐐기골이 나온 후반 10분까지, 이동경을 오른쪽 측면보다 왼쪽 측면에서 더 자주 발견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교체 투입된 후반전 시작부터 바코의 골이 기록된 후반 10분까지, 이동경의 패스 맵(자료 출처: K리그 데이터 포털)

 

  울산은 이동경이 비워두는 오른쪽 측면 지역을 굳이 다른 선수를 이동시켜 메우지 않았다. 바코, 윤빛가람, 고명진, 이동경에 그 뒤를 받치는 원두재까지, 다섯 명의 미드필더가 모두 상대 진영의 왼쪽 절반에 모여 공격을 진행하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공격 형태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상대 진영의 절반밖에 쓰지 않고 있기 때문에, 수비하는 광주 입장에서도 이 공격 전개를 저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수비는 간격을 좁게 유지해 공간을 내주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울산 선수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으니 광주 선수들의 간격이 벌어질 일이 없다. 빽빽하게 모여 선 광주 선수들 사이를 비집고 돌파해내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럼 울산은 왜 선수들의 위치를 재조정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동경에게 프리롤을 부여하고 싶었다면, 다른 선수를 오른쪽 측면으로 옮겨 그 빈 공간을 커버하도록 지시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울산은 한동안 이 형태를 수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는 전술적으로 의도된 포지셔닝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트(Overload to isolate)'라는 축구 전술 개념이 있다. '격리하기 위한 과부하'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이 개념은 상대의 수비 형태를 유도하고 넓은 공간을 창출해 위협적인 찬스를 만드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앞서 고명진이 후방 빌드업 상황에서 보여줬던 공간 창출 방식과 궤를 같이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이 개념이 활용되는 환경은 일반적으로 공격 지역이라는 차이가 있다.

  하프 라인을 넘어 상대 진영으로 진입한 공격 상황. 공을 미리 정해놓은 방향의 측면 지역으로 보낸다. 한 명 정도를 제외하고, 공격에 가담할 선수들을 해당 측면 지역에 전부 투입(과부하)한다. 투입된 선수들은 그 지역 안에서 좁은 간격을 유지하며 공격권을 이어나간다. 이렇게 공을 전진시키면, 상대는 공 근처에서의 수적 열위에 놓이지 않기 위해 해당 방향으로 수비를 밀집시킬 수밖에 없다. 수비가 한쪽 측면에 밀집되면, 자연스레 반대 측면 지역에는 매우 넓은 공간이 발생한다. 이때, 과부하 지역에 투입되지 않고 제외된 한 명(보통, 속도와 드리블이 뛰어난 측면 공격수가 이 역할을 맡는다.)이 그 넓은 공간에서 대기(격리)한다.

  만약 이런 상태에서 과부하 지역 선수들이 공 소유권을 잃지 않고, 격리 지역 선수에게 빠르게 연결할 수 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상대도 격리 지역 선수를 견제하기 위해 마크맨 한 명 정도를 남겨두겠지만, 넓은 공간에서의 1 대 1 상황은 일반적으로 공격 측이 훨씬 유리하다. 또, 이 1 대 1 상황을 막기 위해 과부하 지역의 수비 팀 선수들이 서둘러 움직이면서 수비 블록의 간격이 벌어지고 중앙의 공간을 노출할 수도 있다.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트는 찬스를 만드는 영리한 방법이지만, 모든 팀이 이것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밀집된 과부하 지역에서 공 소유권을 유지할 수 있어야 그다음, 넓은 공간에서의 위협적인 상황을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좁은 공간 안에서도 플레이할 수 있는 민첩함과 기술, 상대의 타이트한 압박 속에서도 주변 동료들의 위치와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시야와 판단력을 모두 갖춘 선수가 팀에 네다섯 명은 있어야 한다. 거기다, 격리 지역의 크랙까지.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트를 검색했을 때 맨체스터 시티의 펩 과르디올라 감독 사진이 유독 많이 보이는 이유다.

 

  다시 울산 이야기로 돌아와서, 바코가 기록한 울산의 두 번째 골은 이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트가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된 장면이었다.

  김태환이 바코에게 패스하기 직전의 상황을 살펴보자. 왼쪽 하프 스페이스 지역에서 이동경과 설영우가 드리블을 시도하며 광주 수비를 밀집시켰다(과부하). 이 과정에서 김봉진에게 두 선수의 드리블이 차단되긴 했지만, 선수들이 좁은 간격을 유지하고 있던 덕에 윤빛가람이 루즈볼을 다시 획득했다. 윤빛가람의 패스를 받은 원두재가 반대 측면의 넓은 공간(고립)으로 전진한 김태환에게 패스를 연결하며 위협적인 상황을 만들었다.

 

후반 9분, 바코의 골 장면 직전의 상황 

 

  이민기, 송승민, 이순민 등이 김태환을 막기 위해 급히 달려오면서 광주의 수비 간격이 벌어졌고, 그 사이로 바코가 멋진 솔로 플레이를 선보이며 골문을 갈랐다. 경기를 결정짓는 득점이었다.

 

 

 

  이렇게 울산은 4경기만에 승리를 거두며 다시 한번 선두를 추격할 수 있게 되었다. 광주 윤보상의 활약으로 더 많은 골을 넣지는 못했지만, 힌터제어가 첫 골을 기록했다는 점은 충분히 긍정적이다. 게다가 상대방의 실수 덕분이라거나 행운이 따른 결과가 아닌, 철저한 준비를 통해 쟁취해낸 결과라 더 고무적이다. 경기 전ㆍ경기 중에 내린 울산의 선택들이 결과를 가져오는데 매우 결정적이었다. 힌터제어를 선발로 내세웠던 점, 힌터제어를 살리기 위해 중원을 두텁게 기용한 점, 광주의 수비를 무력화하고 선제골로 이어진 얼리 크로스, 바코의 쐐기골로 이어진 후반전의 콘셉트 등 한 수 한 수가 적절했다.

 

  이렇게 기세를 탔을 때 승승장구해야 할 텐데, 아쉽게도 다음 라운드 성남전은 리그 내 코로나19 확진자 발생으로 연기되었다. 뜻밖의 휴식기를 맞은 셈이다. 부디 울산이 이번 경기의 감각을 잊지 않고 이어나가, 앞으로도 꾸준히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길 바란다. 3연승 뒤 3연무승은 두 번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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